수필문

빈 땅을 채우는 행복

시인, 김성기 2015. 12. 31. 18:29

      빈 땅을 채우는 행복 / 김성기 한적한 시골 들판에 비어있는 공허한 마음들이 이리저리 나뒹군다 울지도 못하는 빈 수수깡 위로 겨울비 추적추적 내리고 이정표 없는 거리를 찬바람이 휑하니 스친다 시골 동네 어귀로 들어서니 빈 전깃줄에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호탕하게 웃던 까치를 기다리는 마음일까 지켜줄 것도 쫓아 갈 그 무엇도 없이 허수아비는 화장을 곱게 하고 팔을 흔들며 나그네를 반긴다 검은 신사 제비는 언제 떠났을까 봄날, 봄비 내리듯 시골의 풍경은 보이는 대로 아름답고 따뜻하다 어느 새 하얗게 숨을 멈춘 달 농촌 마을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발길을 재촉하여 대문도 없는 외딴 초가집 안을 기웃거리니 부엌 쪽에서 할머니가 들어오라 손짓을 한다 할머니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며 눈물 지린 손등으로 연신 눈을 비비며 나를 아궁이 가까이로 끌어 앉힌다 장작불 앞에 앉아 언 몸을 녹이니 노곤하여 잠이올 것만 같았다 이 순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줄줄 흐를 뿐 천국이 이보다 더 행복할까 혼자 떠나는 겨울여행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을 때 갑자기 할머니가 소리를 버럭 지른다 `고얀 영감탱이 빨리 나와서 장작 좀 패라` 흠칫 놀란 나는 일어서 나가려는데 할머니는 내 손을 잡아끌고 방으로 데려가 아랫목에 발을 넣고 더 쉬라고 한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할머니는 김치수제비를 만들어 오셨다 펄펄 끓던 가마솥에 왕멸치와 배추김치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김치 수제비는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았고 옛 추억을 몽실몽실 피어오르게 하는 맛이었다 차디찬 돌부리와 시리게 아픈 나무들의 사연으로 힘들지만 삭막한 회색도시를 떠나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베푸는 인심은 봄날처럼 따뜻하여 긴 겨울은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고 처음 본 나그네에게 추억의 여행까지 포근하게 선물해주신 할머니는 나의 외할머니처럼 하얀 겨울이면 해월 같이 살아나 산골마을을 찾으리라
      -20151219,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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